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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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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양태교(梁泰橋):1907(융희1)~1943(일제강점기),
  • 작성자 관리자 (DATE: 2017-09-26 16: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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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교(梁泰橋):1907(융희1)~1943(일제강점기), 초등교사, 일제의 皇民化 교육에 저항한 교육자로서 호는 서홍曙紅, 대정읍 상모리(웃 모실개) 양달수梁達洙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21222일 추자교회에서 목포 정명貞明여학교 교사 방필수方必守와 결혼 독실한 크리스찬인 교장의 밀고로 사학관視學官이 찾아와 가미다나의 신주를 불태워 우상 숭배를 알아낸 당국은 19411월 가장 오지인 안덕교 부설 동광東廣 간이학교로 좌천됨. 그리고 그의 유시遺詩 팔도-자랑은 부인夫人인 방필수方必守와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방필수方必守의 고향은 본시 함경남도 원산元山, 기독교의 가정에서 자랐다.그는 19353월에 나주군 봉황면 소재의 봉황교로 전출, 193711월 본인 나기누마(<長沼致豪> 교장에 의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제는 19415월 전도의 교사들을 한림교에 모여 교육자의 자세를 강조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자 동광간이학교 교사 서흥은 시학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국에서 내선일체를 강요 하지만 먼저 일본인부터 이를 앞장서야 한다. 왜 일본인 교사에게는 한국인 교사보다 70%이상의 봉급을 지급하는가! 또 일본인은 한반도와 일본을 자유자재로 출입하지만 한국인에 한해 도항증渡航證을 가져야 통과하게 하느냐! 이는 민족 차별이 아니고 무었인가!“라고 절규 하였다. 그는 1943715일 이승을 떠났으니 당시 파상풍에 의한 것이 었다. 곧 기독교인으로 치러졌다.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왔으며 기독교인장으로 안장 하였다. 1979428일 서홍曙紅 추모비를 봉황교 교정에서 제막식을 거행 6인 그의 제자들은 어려운 시기에서 민족에게 큰 뜻을 편 고인의 높은 뜻과 교육구극의 거룩한 행동을 추념 하였다. 방필수는 본시 원산 태생이나 부친의 기독교 선교관계로 부산에 내려오게 되자 함께 따라와 사립 일신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고등 여학교 5년을 졸업, 목포 정명여학교, 부산진여학교 등에서 6년 동안 교편생활을 한 바 있는 당시로서는 드믄 인텔리 여성이었다. 서홍은 19264월 전남 장흥군의 시골학교 교사로 첫출발 1년 만에 추자교로 전보되자 또 하추자도의 부설하교로 부임 하였다. 당시 초등학교는 4년제인데 신양리의 부설학교는 1년생으로부터 4년생까지 70명이나 되는 아동을 한학급에 수용해 가르친 것이다. 추자에서 9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오지에서 문명의 혜태을 못받은 이들에게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봉사활동을 펼쳤다. 주민의 병에 걸리면 투약과 주사를 놔주고 부녀자의 출산을 도와주고 밤에는 문맹 청년과 미취학 아녀자들을 모아 야학을 통해 글을 가르쳤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사표를 던졌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했던 서홍은 그만 쓰러져 이 정신을 이어받은 전남 나주 봉황교의 제자들은 총동창회를 움직여 스승 양태교(梁泰橋) 훈도의 추모비 건립을 결의하고 아울러 환갑을 맞은 제자들은 대정읍 상모리<모실-> 소재인 고인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여 참배 하였다. 추모비에 제자들이 얼을 모아 지은 겨레의 들불이라는 한시漢詩는 다음과 같다. 서홍의 부부가 일제때 남긴 유시는 겨레의 등불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 바람/춘풍을 만난 무궁화 동산/도다시 갱생하는 이천만/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 동산/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 이 유시는 조국의 해방된 후 동요곡에 맞춰서 전남 지방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 널리 愛誦되었던 것이다[제주교육사(1979), 서홍 양태교 선생 추모비건립위원 회의자료, 비문』 《교육제주(97/김찬흡글/ 서홍 양태교) 제주항일인 사실기(김찬흡/2005):나는 제주교육연구원장 당시 전남 나주로 찾아가 양교사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70넘은 그의 문하생을 만나기도 했다. 서홍은 그의 유고집인 설교노트교안노트17권은 그의 아호와 같이 정열을 쏟은 교육열과 신앙심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부산에 생존중인 방필수方必守 여사(당시90)1998년 초청 내도 시에 유품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전하자 이를 제주교육박물관에 기증 하였다. 이 유고 속에 적은 글은 서홍의 기독교 관과 교육사상을 조명 하는데 값진 자료라고 본다. 첨기:전남 나주군 봉황면 봉황초등학교 15회 졸업생 최한익씨(59)26명은 일제때 민족혼을 일께워준 은사 서홍曙紅 양태교(梁泰橋)의 추모비를 세우고 1979428일 제막식을 가졌다. 5년간 제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일제가 금지한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두려움 없이 떳떳이 가르쳐 애국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일제의 우상인 천조天照 대신의 영정을 불태운 사실이 왜경의 가택 수색으로 드러나 곤욕을 치르면서도 자신의 아호만큼이나 뜨거운 애국충정을 버리지 않았던 서홍은 40년 제주도로 좌천됐다가 이듬해 교단에서 쫓겨났고 광복을 이테 앞두고 병사 제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는 것. 곧 환갑을 맞게된 봉황초등학교 15회 동창생 66명은 작년봄 동창회 때 추모비 건립을 결의 은사의 행적과 유족 및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묘소를 찾고 지난 2얼 추모비를 착공 이날 제막식을 보았다.동아일보 1979.5.8.양태교선생추모비(전라남도 나주시 봉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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